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에 속한 가사도는 면적 6.4㎢, 해안선 길이 19.5km에 이르는 큰 섬이다. 남쪽과 서쪽 해안에 1km 안팎의 고운 백사장이 깔려 여름철 해수욕장으로 사랑받고, 섬 중심에는 다섯 봉우리가 왕(王)자를 그리듯 솟아 풍수담론을 낳는다. 과거 목포 생활권의 흔적과 오늘의 진도와의 연결성이 공존하며, 불교적 전설이 지명에 스며든 독특한 문화 서사가 살아 있다. 신안 하의도와 바다를 사이에 둔 이웃이라 역사, 인물, 생활권 면에서 얽힘이 깊고, 일제강점기의 광업 흔적과 등대·동굴 지형, 간척과 농업 기반이 한 섬 안에 압축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가사도의 매력을 이름과 역사, 접근성과 낙조, 섬 한 바퀴 동선과 핵심 포인트, 가사도의 삶과 산업·전설·관광 팁으로 나누어 정리한다.

1. 이름과 역사, 접근성과 낙조가 만든 가사도의 첫인상
가사도의 이름은 불교에서 스님이 걸치는 옷 가사(袈裟)에서 왔다는 해석이 널리 알려져 있다. 주지도 양덕도 장산도 등 인근 섬들을 차례로 돌며 아랫도리 윗도리 장삼 가사 목탁의 상징을 갖춰 예불 형상을 이룬다는 구전이 전한다. 선착장 인근 평화통일 기원 일붕시비는 이 이야기에 불교적 의미를 덧입힌 증거물이다. 한편 하늘에서 본 섬 형상이 가위(전라도 사투리로 가세)를 닮아 가세섬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병존한다. 지명과 전설이 맞물려 섬의 정체성에 층위를 더해준다.
행정, 생활권의 변화도 가사도의 얼굴을 빚었다. 한때 신안군에 소속되기도 했으나 지금은 진도 조도면에 속하며, 목포 가사도 직항 여객선과 진도 가학리선착장을 잇는 차도선이 공존한다. 가학에서 가사도까지 약 20분 남짓, 하루 세 차례 운항하는 차도선 덕에 진도 읍내와 육지 접근성이 좋아졌고, 목포행 완행 여객선은 오랜 생활권의 끈을 이어준다. 바람과 물길이 거친 외해 특성 탓에 항로 개설이 늦었지만, 지금은 목포 진도 양 축으로 생활 반경이 나뉜다.
가사도의 첫인상에 낙조는 빠질 수 없다. 진도 가학리의 세방낙조 전망대는 다도해의 섬들을 병풍처럼 세우고 해가 바다로 미끄러지는 장면을 압권으로 보여준다. 주지도·양덕도·혈도·광대도, 멀리 신안 하의도까지 층층이 겹치는 실루엣은 남서해 일몰의 정수를 보여준다. 가사도에서 마주하는 바다 역시 일몰 때 가장 웅숭깊은 표정을 띠며, ‘섬과 섬 사이로 넘어가는 해’가 여행의 기억을 선명하게 박아 넣는다.
2. 활목선착장 에서 염전 라인 섬 한 바퀴
가사도 여행은 활목선착장에서 시작된다. 붉은 벽돌 대합실이 있는 물양장은 조용하고 느긋하며, 선착장에서 오르막을 조금만 올라서면 궁항리 표지석과 기념비가 마을의 관문을 알린다. 섬은 크게 가사리, 활목, 돌목 세 자연마을로 이뤄져 있고, 행정구역은 가사1·2·3구로 나뉜다.
돌목마을까지 언덕을 넘는 길
선착장에서 포장길을 따라 언덕을 넘으면 시야가 탁 트인다. 바다 위에 마도·가덕도·접우도·외공도가 돛배처럼 흩어져 있고, 밭과 논이 펼쳐진 전형적 농촌 지형이 마을을 감싼다. 가사도가 다도해에서도 드물게 ‘농업이 발달한 섬’이라는 사실을 이 동선에서 가장 체감하게 된다. 중간 갈림길의 내연발전소 표지판은 섬 전력의 변천사를 상기시킨다. 1980년대 이전엔 자가발전과 부분 송전이 일상이었고, 1993년 가사도발전소 가동으로 상시 전력공급 체계가 자리 잡았다.
큰 모래땅 섬 최대 해수욕장
돌목마을 사거리에서 오른쪽 소나무숲길을 따라가면 방풍림 사이로 400m 남짓 백사장이 드러나는 ‘큰 모래땅’ 해수욕장이 나온다. 대나무 파라솔과 흔들의자, 소규모 포구, 짧은 방파제, 그리고 붉은 기운을 머금은 맥반석성 암괴가 한 프레임에 담긴다. 북서 해안은 급경사 암벽, 남서 해안은 사질이 잘 발달한 대조적 지형이 연속되어 산책 리듬이 다채롭다. 물양장은 옛 바위섬을 메워 만든 것으로, 이곳의 생활 인프라가 자연지형 위에 얹혀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등대 광산 동굴 임도 산책
돌목에서 등대로 향하는 길은 선택지가 두 갈래다. 임도를타면 ‘십자동굴길’과 일제강점기 광석 채굴 흔적을 차례로 지난다. 가사도 등대는 1915년 무인점등으로 출발해 해무·암초·다도해 항로 안전 문제로 1984년 유인등대로 전환되었다. 해식애를 깎아 올린 절벽 위 데크 계단과 쉼터 벤치, 공원화된 주변 시설이 걷기 좋은 등대를 만든다. 등대 아래 대·소동도 일대의 해식지형은 바다의 침식력이 빚은 자연 박물관과 같다. 북쪽 해안의 중굴(스님 동굴)은 파식동굴로, 수십 명이 들어갈 넓이를 자랑한다. 섬 전체에 규석·납석·명반석 광물이 분포하고, 북·남쪽 동굴엔 채굴 흔적이 남아 산업사 현장감을 더한다.
큰마을·활목 염전과 간척, 농업의 섬
활목마을 40여 호를 지나면 한쪽은 바다, 한쪽은 매립 간척지다. 제방 너머의 들판과 염전, 저수지는 가사도의 오늘을 지탱하는 기반 시설이다. 가사도 전체 농지의 ⅔ 이상이 간척지이며, 논만 28.4ha에 달한다. 1970년 저수지 축조 이후 경지 정리가 이어졌고, 경지 면적 143.5ha는 도서부에서 보기 드문 규모이다. 다만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경작지 일부가 휴경인 현실도 동시에 마주치게 된다. 큰마을 가사리는 100호 안팎의 집들이 다닥다닥 모여 있고, 마을회관·출장소·보건진료소 같은 생활시설이 도로변에 모여 있다. 진도서초 가사도분교는 학생 수가 크게 줄었으나, 섬 교육의 거점으로 여전히 제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3. 산업 전설 인물과 여행 팁
가사도는 바다와 밭을 함께 일구는 섬이다. 주 작물은 고구마이며, 쌀 보리 콩 마늘 유채가 따라온다. 바다에선 장어 멸치가 주로 잡히고, 미역 톳 모자반 양식, 최근에는 전복 양식과 전복의 먹이용 다시마 재배가 소득을 보탠다. 어장의 여건 악화와 연료비 상승으로 1980년대 이후 저인망 어업은 줄었고, 해조류·전복 중심의 양식업이 대체했다. 다만 전복은 손이 많이 가 고령층이 쉽게 뛰어들기 어려워 세대 교체와 가구 간 역할 분담이 관건이다.
섬 문화의 밑바닥에는 독특한 금기가 흐른다. 살생하면 벌을 받는다는 불교적 정서 탓에 ‘어업은 부업’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했고, 실제로 많은 가구가 농업과 병행해 왔다. 섬 이름의 유래와 전설, 당산숲과 제의, 등대와 동굴, 광산과 간척이 한데 얽혀 만들어낸 정체성은 불교적 색채를 띤 농업의 섬이라는 가사도의 별칭을 설득력 있게 만든다.
인물사에서도 섬의 자긍심이 드러난다. 군 장성 출신으로 공공기관 수장을 역임한 김영대 준장, 학계 행정컨설팅 분야에서 왕성히 활동한 박완신 전 총장, 법조계 인사들이 이어진다. 과거 톳·김 호황기에 교육 투자로 목포 유학길에 오른 자녀들이 각계에서 두각을 드러낸 사례가 적지 않다.
여행 실전 팁을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
들어가기: 진도 가학리선착장에서 차도선을 타는 루트가 가장 빠르다. 운항 횟수는 하루 3회 내외라 출발 전 시간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자가차량은 선적 예약이 안전하다.
걷기 난도: 활목 돌목 등대 큰모래땅 가사리 순환은 완만한 오르내림이 있으나 트레킹화면 충분하다. 여름엔 방풍림 그늘이 든든하지만 수분 보충은 필수이다.
뷰 포인트: 세방낙조 전망대(진도 가학)에서 일몰을 잡고 가사도 입도 또는 가사도 등대에서 섬 실루엣 낙조를 노리는 투스팟 구성이 좋다.
관찰 거리: 등대 아래 대·소동도 해식애, 북안 파식동굴, 간척지 염전, 맥반석 암괴는 지형 산업 생태를 한 번에 읽을 수 있는 교과서이다.
에티켓: 간척지 사유지, 양식장 어장 장비가 많은 구간이 있으므로 출입로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동굴·광산 잔여부지는 안전 표지에 반드시 따르는 것이 좋다.
가사도는 큰 섬 의 체급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불교 설화에서 비롯된 이름과 의례, 등대와 광산, 농업과 간척, 바다와 백사장, 그리고 섬사람의 생활감이 한 화면 안에서 겹겹이 중첩되는 곳이다. 외따로인 듯 보이나 항로가 열리고 동선이 다듬어지며, 섬의 기억은 더 많은 발걸음 속에서 현재형으로 갱신되고 있다. 백사장에 파도가 도장을 찍고, 언덕 너머 마을 논두렁에 바람이 결을 내리면, 가사도는 오늘도 조용히 제 얼굴을 닦아 빛낸다. 이 섬의 매력은 화려함이 아니라, 오래된 이야기와 생활의 밀도에서 나온다. 그래서 한 번 다녀온 이들은 대개 다시 가겠다 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