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 동북쪽 바다에 떠 있는 금당도(金塘島)는 이름처럼 귀한 풍경과 풍요로운 바다를 품은 섬이다. 금당도는 이름처럼 귀하다. 15개의 무인도와 해안 기암이 빚는 풍경은 장엄하고, 바다에 기대어 살아온 섬사람들의 기술과 공동체 기억은 묵직하다. 완도 소속이면서도 녹동·회진 생활권을 오가는 입지, 울포항·가학항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바닷길, 봄이면 미역·다시마·톳이 달력처럼 섬의 시간을 채우는 일상까지, 금당도의 가치는 현재진행형이다.

1. 금덩이에서 온 이름, 금당도의 뿌리
금당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금당면에 속한 섬으로 동경 127°01′, 북위 34°23′에 자리한다. 면적은 12.487㎢, 해안선 길이는 37.4km, 최고봉은 삼산(219.8m)이다. 행정적으로는 3개 리(차우리·육산리·가학리)에 6개 마을이 있고, 2016년 기준 506가구 1,044명이 살았다. 초등학생 29명, 중학생 21명으로 당시만 해도 교육 인프라가 살아 있었으나, 1975년 6,400명에 달하던 인구가 1985년 4,000명, 현재는 천여 명 수준으로 줄어든 흐름은 섬사회가 겪는 공통의 변화를 보여준다.
지명에는 이 섬의 상징이 담겼다. 금일·금당·생일도의 금(金)자 지명과 금곡 같은 지명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 금이 산출된 고사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금덩이(금댕이)에서 금당으로 굳어진 이름은 섬의 정체성과도 닿아 있다.
입도와 삶의 방식도 독특하다. 1770년 영조 때 인천 이씨가 평일도에서 떼배를 타고 들어와 터를 잡았고, 뒤이어 김씨 등이 이주해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전해진다. 금당도는 한동안 봉산(封山)으로 지정되어 무분별한 벌목이 금지되었고, 명목재인 소나무는 수군 병선과 관아 건축에 쓰기 위해 특별 관리되었다. 주민들은 병영과 관청에 땔감을 바치며 바다와 산을 함께 관리해 왔다.
이 섬은 15개의 무인도를 거느린다. 덕분에 섬 둘레를 따라가면 다도해 특유의 점묘화 같은 바다 풍경이 이어지고, 곳곳에서 파식대·해식애·바다 동굴이 연출하는 해안 지형미를 만날 수 있다. 이름값을 하는 ‘귀한’ 풍경이 섬을 감싸고 있어 한 바퀴만 돌아도 금당도의 금빛이야기를 직감하게 된다.
2. 완도 소속이지만 생활권은 녹동과 회진, 바다의 리듬으로 사는 섬
금당도는 행정구역상 완도군에 속하지만 생활권은 고흥 녹동·장흥 회진과 밀착되어 있다. 실제 접근성도 그렇다. 녹동항→금당도는 배로 약 50분, 녹동에서 거금도·연홍도 등을 경유해 평일도까지 가는 평화페리호가 대표 항로다. 완도 읍내를 왕복하려면 하루 일정이 빠듯해 동부권 교통 불편이 지역 발전의 과제임을 실감하게 한다.
섬의 관문은 울포항과 가학항 두 곳이다. 울포항 방파제에는 새천년을 여는 완도군 금당면 표지석과 섬 연혁 안내가 서 있고, 선착장 옆으로 매표소·대합실이 있다. 선착장을 나서면 왼쪽 금당로(차도)와 오른쪽 차우길(골목길)로 갈라지는데, 금당로는 가학항으로, 차우길은 면사무소와 수협·우체국·마트·식당 등 생활 인프라로 이어진다. 골목 끝에는 아담한 사찰 금당암이 있어 마을을 내려다보며 잠시 숨 고르기 좋다.
주말이면 섬이 더 조용해지기도 한다. 면사무소·우체국·농협 같은 공공기관 종사자들이 주말에 육지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섬은 고요 속에서 자기 리듬을 유지한다. 바닷길을 달리는 차도선에 호주산 암염 포대가 실려 들어오고, 항구의 미역 공장에서는 소금에 절인 미역을 손질하는 손길이 분주하다. 현장에는 카자흐스탄·러시아·동남아 출신 노동자들도 함께 일한다. 힘든 일을 기피하는 현지 청년층의 변화와 맞물려, 해조 가공 현장은 다문화 노동의 전형적인 현장이 되었고, 금당도의 바다 경제도 그 흐름 속에 놓여 있 다.
울포(鬱浦)라는 지명도 흥미롭다. 술맛이 좋아 울금(鬱今)이라 불리던 곳이 세월을 지나 울포로 바뀌었다고 전한다. 이름만으로도 곡우 무렵 촉촉한 해풍과 젖은 솔향이 떠오른다.
3. 미역·다시마·톳의 섬, 가학리에서 만난 금당도의 오늘과 금당팔경 여행법
금당도의 바다경제 중심에는 가학리가 있다. 장흥에서 이씨·정씨가 들어와 터를 잡았다는 이 마을은 지형이 ‘학’처럼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었다. 예전에는 지주식 김양식의 최적지로 이름을 날렸고, 일본 수출까지 할 만큼 호황을 누렸다. 1960
70년대 김 한톳(100장)에 2,000~3,000원 하던 시절, 김 값이 금값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고, 김 공장도 13곳이나 운영되었다. 지금은 3곳 남짓만 가공을 이어가며, 원료 일부는 외지에서 들여온다. 바다는 늘 변했고, 금당도의 어장은 그 변화에 발맞춰 미역·다시마·톳 중심으로 체질을 바꿨다.
금당도의 봄은 미역으로 시작된다. 2월 중순부터 미역줄을 들어 올리는 소형 어선들이 바다 위를 바쁘게 오가고, 뭍에서는 소금에 버무려 햇살에 말리는 장면이 펼쳐진다. 4월 20일 전후까지 미역철, 5월엔 다시마, 6월엔 톳이 뒤를 잇는다. 한 줄 100m 미역줄에서 약 2톤이 나고, 톤당 100만 원 기준이면 한 줄에 200만 원 남짓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많게는 100줄까지 운영하는 집도 있어 섬의 계절 소득 구조를 잘 보여준다. 섬 앞바다는 여객선 항로를 제외하면 부표가 빽빽한 양식장 지대로, 멀리서 보면 섬이 양식장에 둘러싸인 듯하다.
바다와 더불어 마을의례도 남아 있다. 어촌회관 뒤편 상당(할아버지당)과 하당(할머니당)에서 정월 당제를 지내고, 바닷가에서는 갯제를 올리던 풍습이 전해진다. 2002년 이후 상당에는 유래비만 세워두었지만, 공동체 어장의 기억과 규범은 여전히 섬살이의 질서를 지탱한다.
여행자라면 놓치기 아까운 풍경이 있다. 선착장 안내판에 적힌 금당팔경이다. 영조 때 학자 위백규(魏伯珪)가 금당도의 풍경을 읊은 〈금당별곡〉이 전하고, 그중 적벽청풍은 해금강을 떠올리게 할 만큼 장쾌하다. 해안에서는 파식과 주상절리가 만든 조형미가 압권이다. 코끼리바위·병풍바위·스님바위·부처바위 같은 이름난 기암은 배에서 보아야 제맛이 나고, 부채·병풍 바위의 단면에는 육각형 주상절리가 선명하다.
섬 둘레 드라이브 코스도 좋다. 승용차로 천천히 돌아보면 약 2시간이면 족하지만, 오르내리는 고갯마루마다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들이 층층이 겹친다. 새벽에 무인도를 징검다리 삼아 어장으로 나가는 배, 고금도 너머 섬 사이로 빠지는 노을빛 일몰, 항구의 미역 공장에서 분주히 일하는 사람들까지, 금당도의 하루는 파도처럼 리듬을 타며 흘러간다. 여행자는 그 리듬 한가운데에서 바다의 시간을 체험하면 된다.
한 바퀴 돌아보는 데는 두 시간이면 충분하지만, 금당팔경과 양식장의 계절, 골목마다 번지는 소금기와 해풍의 냄새까지 제대로 느끼려면 하루도 모자라다. 완도·고흥 여행에 금당도를 더하면, 지도로만 보던 다도해의 점들이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금당도는 오늘도 금빛 바다 위에서 묵묵히 자신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