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보령 앞바다에 떠 있는 장고도(長古島)는 풍성한 해산물과 200년 넘게 이어온 전통놀이가 공존하는 섬이다.
장고도는 크지 않은 섬이지만 이야기의 밀도가 높다. 바람과 파랑이 만든 해변, 등바루놀이로 상징되는 공동체의 기억, 젓갈과 염전의 노동사, 명장섬과 당너머의 백사장, 용굴의 전설까지 하나의 서사로 엮여 있다. 북풍이 세차게 부는 겨울에도, 해당화가 만발하는 늦봄에도, 여름 피서철의 햇살 속에서도 장고도는 각기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대천항에서 출발한 배가 간조·만조를 배려해 섬의 양쪽을 번갈아 드나들 듯, 여행자도 바다의 시간에 속도를 맞출 때 비로소 이 섬의 본모습을 만난다.

1. 장고도 개요와 지명, 그리고 바다와 함께한 삶의 리듬
장고도는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에 속한 섬으로 면적 1.5㎢, 해안선 길이 8.6km, 대천항에서 약 22km 거리에 있다. 행정상으로는 오천면 삽시도리에 속하며, 삽시도에서 뱃길로 약 30분이면 닿는 위치다. 2021년 기준 132가구 308명이 거주하는 작은 섬이지만, 풍부한 어자원 덕분에 ‘부자 어촌마을’로 불릴 만큼 바다가 준 혜택이 두텁다. 섬의 윤곽이 멀리서 보면 장구처럼 보여서 장구섬·장고섬이라 불리다가 1910년 이후 장고도로 굳어졌다는 지명 유래도 흥미롭다.
장고도는 대천 연안 섬 중에서도 북쪽에 치우친 위치라 북서풍을 정면으로 맞받는다. 역설적으로 이 강한 바람과 파랑이 모래 이동을 일으켜 섬 곳곳에 넓고 탄탄한 백사장을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장고도는 ‘충남의 제주도’ 혹은 ‘황금의 섬’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바람을 불편함이 아니라 자산으로 바꾸는 섬의 방식이 인상적이다.
섬의 관문은 흔히 대머리(대멀) 선착장이라 부르는 북동단 포구다. 간조·만조의 차가 큰 서해 특성상 썰물에는 북쪽, 밀물에는 남쪽 등대 방면으로 여객선이 접안한다. 방파제 끝의 하얀 등대는 장승처럼 우뚝 서서 섬의 하루를 밝힌다. 선착장 뒤편엔 소나무 그늘의 작은 공원과 등바루공원이 이어져 있고, 2009년 희망근로사업으로 복원된 등바루관이 놀이의 기억을 보존한다. 해당화 군락지와 나란히 이어지는 해안길은 초여름 특별한 향으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장고도의 생계는 지금도 바다와 맞닿아 있다. 까나리·새우 등 계절 수산물이 들어올 때면 골목마다 젓갈통이 늘어서고, 봄에는 까나리, 여름에는 새우로 젓갈을 담그는 풍경이 일상이 된다. 주민 상당수는 어업과 민박을 병행해 생계를 유지하며, 염전 저수지와 옛 염전터가 남아 있어 과거의 노동 지형을 보여준다. 교회와 분교, 소규모 매표소·매점이 해안과 마을의 경계에 놓여 섬살이의 리듬을 잇는다.
방파제와 물양장은 지금도 개보수 공사가 이어지며, 해안탐방로는 북쪽 명장섬해수욕장에서 남쪽 당너머해수욕장까지 연결된다. 탐방로 곳곳에는 뱀 주의 안내가 있을 정도로 생태가 살아 있고, 대나무와 소나무 방사림이 바람의 방향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장고도는 태안해안국립공원 끄트머리에 닿아 있어 개발 제한이 엄격하며, 덕분에 해변선은 비교적 자연스러운 결을 유지한다.
2. 200년을 이어온 ‘등바루놀이’와 섬 공동체의 의식
장고도의 자부심은 단연 등바루놀이다. 정월 대보름 혹은 음력 4월 8일 전후, 해당화 피는 계절에 맞춰 열리는 이 놀이는 장고도 처녀들이 바닷가에 둥근 돌담(등바루)을 쌓는 일로 시작한다. 바다 쪽으로는 폭 약 1m의 입구를 터서 물길이 드나들게 하고, 놀이 날이 되면 두 편으로 나뉘어 조개·어물잡기 경합을 벌인다. 정오 무렵 승패를 가른 뒤 한복을 차려입고 등바루 안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점심과 노래·춤을 나누는 의식은 공동체가 다음 세대의 성년을 공적으로 인정하는 통과의례 같은 성격을 지닌다.
이 전통은 섬의 해양 노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굴캐기·노래 부르기·‘굴아씨 뽑기’ 같은 프로그램과 함께 풍어제가 이어지고, 청년들이 횃불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액운을 막는 등불써기는 지신밟기의 해안형 변주처럼 보인다. 장고도 등바루놀이는 1981년 제주 제21회 전국민속대회에서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며 전국적 주목을 받았고, 이후 등바루공원·등바루관 조성으로 전승 기반을 다졌다.
섬 교회가 지역 경제와 생활문화에 보탠 사례도 특별하다. 과거 이웃 섬과 함께 까나리액젓 제조·유통을 도우며 김장철 전국 교회에 납품했고, 이는 섬 경제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풍요의 기억은 젓갈통이 늘어선 골목, 여름철 수련회로 북적이는 교회 마당, 밤에만 들어오던 전기를 공동체로 확장해 쓰던 이야기 속에 지금도 살아 있다. 장고도의 민속은 박물관 유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활의 장에서 이어진다.
3. 당너머의 백사장과 용굴 전설, 걸어서 즐기는 해변 아틀라스 명장섬
장고도의 여행 동선은 대머리선착장에서 시작한다. 해안탐방로 1구간을 타면 명장섬해수욕장(약 1.25km)으로 이어지고, 길 중간에는 대나무 숲, 소나무 방사림, 가끔 조망이 트이는 모래 전경이 번갈아 나온다. 비포장 구간이 끝나면 오른편으로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지는 명장섬해수욕장이 나타난다. 맞은편의 명장섬은 크고 작은 네 개의 섬이 이어진 형태로, 조수간만에 따라 해변과 섬 사이에 자갈길이 드러나 모세의 기적같은 풍경을 만든다. 완만한 경사, 단단한 모래 입도, 넓은 간조대 덕분에 가족 여행에도 부담이 적다. 해 질 녘 명장섬 너머로 떨어지는 서해 일몰은 장고도 풍경의 하이라이트다.
명장섬에서 해안길을 더 따르면 아담한 곡선을 그리는 당너머해수욕장이 나온다. 이름 그대로 당산 너머에 놓인 백사장으로 길이 약 1km다. 남쪽 끝 갯바위 지대에는 용굴이 있는데, 바다의 이무기가 용이 되려 해변을 기어오르다 바위에 막혀 구멍을 뚫고 지나갔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용굴 너머로 보이는 용난바위는 이무기가 백년 수도 끝에 승천했다는 상징을 품는다. 전설과 지형이 포개지며 여행자에게 한 편의 서사를 건넨다. 해안선 곳곳에 코끼리바위 같은 기암괴석도 있어 간조 때 갯벌과 암반을 함께 즐길 수 있다.
해변 뒤편 들판은 이름도 정겹다. 웃방축들·가운뎃축방들·아랫방들 같은 전통 지명이 지도 위에 살아 있어, 바다가 들고 나는 리듬에 맞춘 논농사와 어업의 공존을 짐작하게 한다. 염전 저수지와 옛 염전터, 장고분교를 잇는 길은 섬살이의 생활사를 보여주는 산책 코스다. 제2해안탐방로로 장고분교–돛단녀 전망대–달바위(약 1km) 구간을 걷다 보면, 방풍림 너머로 하얀 포말이 부서지는 서해의 표정을 가까이서 느끼게 된다.
장고도는 드라마 〈구름계단〉 촬영지로도 알려졌다. 대천항에서 들어오는 선착장, 큰말 여객선 매표소, 보건소 일대가 드라마의 주요 무대였고, 지금도 여름이면 촬영지 표식을 찾아다니는 발길이 이어진다. 다만 장고도 여행의 매력은 화면보다 느린 속도에 있다. 간조·만조 시간표, 바람의 방향, 백사장에 그려지는 미세한 물결 무늬 같은 시간의 디테일이 섬의 진짜 얼굴을 보여준다.
장고도는 오늘도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바다 위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