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체제를 끝낸 1979년 10월의 충격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권력 구조가 급변한 결정적 순간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 범죄가 아니라 장기 집권 체제 내부에서 발생한 정치적 균열이었다.
유신체제를 끝낸 1979년 10월의 충격을 통해 당시 권력 내부의 갈등과 시대적 배경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사건의 배경과 권력 내부의 긴장 구조
1979년 당시 대한민국은 장기간 유지된 유신체제 아래에서 정치적 긴장이 극도로 누적된 상태였다. 대통령 중심의 권력 구조는 군과 정보기관 그리고 경호 조직을 중심으로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으나 그 내부에서는 보이지 않는 갈등이 지속적으로 쌓여가고 있었다. 중앙정보부는 정권 유지의 핵심 기관이었지만 동시에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구조 속에서 책임과 압박을 함께 짊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구조는 정보 실패가 곧 개인에 대한 신임 상실로 이어지는 불안정한 환경을 만들었다.
중앙정보부장은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바탕으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으나 그만큼 정치적 부담도 컸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여러 차례 정보 판단과 대응 문제로 질책을 받았고 보고 과정에서도 경호 조직의 개입으로 번번이 제약을 받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특히 대통령 경호실장은 대통령과의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 면에서도 매우 강력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정보기관과 경호 조직 사이의 갈등은 점차 개인적 감정의 충돌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시기 사회 전반에서도 체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 노동 현장과 대학가를 중심으로 시위가 잇따랐고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는 대규모 민중 항쟁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권 핵심부는 위기 대응을 둘러싸고 책임을 전가하며 내부적으로 분열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1979년의 사건은 단발적인 충동이 아니라 장기간 누적된 정치적 압박과 권력 내부의 균열이 임계점에 도달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2. 사건의 전개와 유신체제의 붕괴
1979년 10월 26일 저녁 중앙정보부 시설에서 대통령과 측근들이 함께한 만찬 자리가 열렸다. 이 자리는 외형상 평범한 공식 일정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권력 내부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는 무대가 되었다. 만찬 도중 최근 발생한 대규모 시위 사태에 대한 책임을 둘러싸고 격한 언쟁이 오갔고 그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공개적인 질책과 비난이 이어졌다. 이는 이미 극도로 고조된 감정 상태에 결정적인 자극이 되었다.
만찬이 진행되는 동안 중앙정보부장은 계획적으로 움직이며 주변 인물들을 배치했다. 그는 사전에 군 핵심 인사와 부하들을 대기시키고 사건 이후의 상황까지 염두에 둔 준비를 진행했다. 결국 일정 시간이 지난 뒤 그는 무기를 사용해 대통령과 경호 책임자를 사살했다. 이로써 18년간 지속된 장기 집권 체제와 유신 정치 구조는 한 순간에 붕괴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최고 권력자의 사망으로 끝나지 않았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정치 질서가 붕괴되면서 국가 운영 전반이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장기간 억눌려 있던 사회적 불만은 체제 붕괴와 맞물려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유신체제는 법적으로는 즉각 종료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권력이 어떻게 급작스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3.사건 이후의 대응과 역사적 평가
사건 직후 군과 보안 조직은 즉각적인 대응에 나섰다. 대통령 살해범으로 지목된 인물은 신속히 체포되었고 국가 최고 권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비상체제가 선포되었다. 계엄령은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군은 치안과 정치 질서 유지를 명분으로 전면에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권한대행 체제가 구성되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군 내부로 이동하게 되었다.
사법 절차를 통해 사건 관련자들은 빠르게 재판에 회부되었고 중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사건의 동기와 배후에 대해서는 이후에도 오랜 기간 논란이 이어졌다. 개인적 감정에 의한 범행이라는 해석과 체제 내부의 정치적 충돌이라는 해석 그리고 국제 정세와 외부 요인의 개입 가능성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이처럼 사건의 성격은 단일한 설명으로 규정되기 어려운 복합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사건은 유신체제 말기의 정치적 파열음을 집약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노동 문제와 정치 탄압 그리고 야당 탄압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체제가 이미 내부적으로 붕괴 직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민중 항쟁과 정치 권력 내부의 분열이 동시에 작용한 역사적 귀결이었다. 이후 대한민국은 새로운 정치 질서를 모색하는 과정에 들어섰으며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권력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성찰하게 만드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