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과 시민이 독재에 맞선 1960년의 분기점은 제1공화국 말기 대한민국 사회의 긴장과 저항이 폭발한 역사적 장면이다.
이 시기는 학생들의 자발적인 행동이 시민 항쟁으로 확산되며 정치 변화를 이끌어낸 과정이었다.
학생과 시민이 독재에 맞선 1960년의 분기점을 통해 제1공화국이 붕괴로 향하게 된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학생운동의 각성과 2월 28일 대구 시위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발생한 학생 시위는 한국 현대사에서 학생운동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꾼 사건이었다. 그날 오후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교문을 나서며 외친 구호는 단순한 학교 문제를 넘어 정치 권력에 대한 정면 비판이었다. 학생들은 학원의 자유를 요구했고 교육 현장이 정치 도구로 전락한 현실에 분노를 표출했다. 이는 오랜 기간 통제와 동원의 대상이었던 학생들이 처음으로 집단적인 반정부 행동에 나선 순간이었다.
제1공화국 시기 학생들은 학도호국단이라는 조직에 편입되어 있었다. 이 제도는 명목상으로는 국가 안보와 애국심을 강조했지만 실제로는 학생들을 정권 친화적인 관제 시위에 동원하는 수단으로 작동했다. 학생들은 북진 멸공과 반공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서야 했고 고위 관료가 나타나면 길가에 서서 박수를 치는 역할을 강요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판단해 정치 권력에 맞서 시위를 벌인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구 지역 학생들이 먼저 움직이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선거를 앞둔 정치적 통제였다. 야당 후보의 유세에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학교 당국과 행정 기관이 시험 일정 변경과 행사 강행 같은 조치를 취했다. 학생들은 이를 명백한 정치 개입으로 인식했고 침묵 대신 행동을 선택했다. 이 시위는 비록 많은 학생이 연행되는 결과로 끝났지만 전국에 강한 메시지를 던졌다. 학생들이 더 이상 권력의 지시에만 따르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 전국으로 확산된 학생 시위와 사회적 긴장
대구에서 시작된 학생 시위는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서울과 대전 수원 부산 등 주요 도시에서 학생들은 잇따라 거리로 나섰다. 이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했고 정치 권력이 교육 현장을 지배하는 현실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학생들은 더 이상 소수의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 전국적인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확산은 제1공화국 체제가 내부적으로 얼마나 큰 불신과 피로를 안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였다.
이 시기의 학생 시위는 단순히 정치 구호를 외치는 수준을 넘어 실제 충돌로 이어지기도 했다. 경찰과 무장 경력이 학생들을 곤봉으로 진압하면서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고 연행자 수도 급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폭력적인 진압은 학생들과 시민들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일부 지역에서는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서 민주주의를 외쳤다. 이는 당시 대학생들조차 위축된 상황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정치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강제 신문 구독과 정치 선전물 시청 그리고 특정 정치인에 대한 찬양 교육에 대한 반감이 시위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학생들은 민주주의가 교과서 속 문장이 아니라 현실에서 지켜져야 할 가치라는 점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학생 시위는 단순한 교육 문제를 넘어 사회 전반의 부정과 억압을 고발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3. 3월 15일 부정선거와 마산 시민 항쟁
1960년 3월 15일에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는 제1공화국의 정당성을 스스로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였다. 선거 과정에서 대리 투표와 사전 투표 그리고 공개 투표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고 야당 참관인들은 투표소에서 쫓겨났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선거는 민주적 절차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 사실은 이미 선거 당일 전국적으로 알려지며 민심을 급격히 악화시켰다.
마산에서는 선거 당일부터 시민들의 저항이 본격화되었다. 민주당 참관인이 투표함에서 사전 투표 흔적을 발견하면서 분노는 폭발했다. 시민들은 투표의 공정성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고 학생과 시민이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 밤이 되면서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고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다수의 시설이 파괴되었고 도시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마산 시민 항쟁은 단순한 지역적 사건이 아니었다. 이는 전국적으로 누적된 불만이 한 지점에서 폭발한 결과였다. 학생들의 시위가 불씨가 되었고 시민들의 분노가 이를 받아 대규모 항쟁으로 발전시켰다. 이 사건은 이후 4월 혁명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제1공화국은 더 이상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고 결국 권력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학생과 시민이 함께 만들어낸 이 저항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