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권력의 균열과 유신체제의 종말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정치 권력이 내부에서 붕괴된 결정적 사건이다.
이 사건은 장기 집권 체제의 긴장과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은 결과였다.
1979년 권력의 균열과 유신체제의 종말을 통해 당시 정치 구조와 그 파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유신체제 말기의 정치 상황과 권력 내부 갈등
1970년대 후반 대한민국은 유신체제 아래에서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불만이 동시에 누적된 상태였다.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한 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 과도한 권한을 부여했고 입법과 사법 기능은 사실상 행정부에 종속되어 있었다. 이러한 권력 구조는 겉으로는 안정적으로 보였으나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균열을 안고 있었다. 정치적 반대 세력은 제도권에서 배제되었고 사회 각계에서는 불만이 점차 표면화되고 있었다.
특히 정보기관과 군 그리고 대통령 경호 조직 사이의 미묘한 권력 관계는 체제 말기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중앙정보부는 정권 유지의 핵심 기관이었으나 정보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직접적으로 부담해야 했다. 반면 대통령 경호 조직은 대통령과의 근접성을 바탕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과정에서 정보기관의 보고와 정책 제안이 차단되거나 왜곡되는 일이 반복되었고 이는 내부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사회적 저항도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노동 현장과 대학가에서 불만이 확산되었고 지역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은 정권 내부에서 위기 인식을 공유하게 만들었으나 대응 방식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일부는 강경 진압을 주장했고 일부는 정치적 전환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유신체제 말기의 정치 상황은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분열이 동시에 작용하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2. 사건의 전개와 최고 권력의 붕괴
1979년 10월 26일 저녁 중앙정보부 시설에서 대통령과 핵심 인사들이 함께한 만찬 자리가 열렸다. 이 자리는 표면적으로는 일상적인 일정이었으나 실제로는 장기간 누적된 갈등이 폭발하는 현장이 되었다. 만찬 도중 최근 발생한 대규모 시위 사태에 대한 책임을 둘러싸고 격한 질책과 공박이 오갔다. 정보기관 책임자에 대한 비난은 이미 극도로 고조된 감정을 자극했다.
이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장은 사전에 준비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주변 인물들을 배치하고 사건 이후의 상황까지 염두에 둔 행동을 취했다. 결국 그는 무기를 사용해 대통령과 경호 책임자를 사살했다. 이로써 장기간 지속되던 유신체제의 핵심은 한 순간에 붕괴되었다. 최고 권력자의 사망은 곧 체제 전체의 붕괴를 의미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범행을 넘어 정치 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강력해 보이던 권력 체제는 내부에서 발생한 충돌 하나로 급격히 무너졌다. 유신체제는 법적으로 즉각 종료되지는 않았지만 정치적 정당성과 통치 기반을 상실했다. 이 사건은 권력이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내부의 균열로도 붕괴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였다.
3. 사건 이후의 대응과 역사적 의미
사건 직후 군과 보안 조직은 즉각적인 통제에 나섰다. 대통령 살해범은 신속히 체포되었고 국가 권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비상조치가 취해졌다. 전국적인 계엄이 선포되면서 군은 정치와 사회 전반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었다. 형식상으로는 권한대행 체제가 출범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군 내부로 이동했다.
사법 절차를 통해 사건 관련자들은 빠르게 재판을 받았고 중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사건의 동기와 배후에 대해서는 이후에도 오랜 논쟁이 이어졌다. 개인적 감정에 의한 범행이라는 해석과 체제 내부의 정치적 갈등이라는 해석 그리고 국제 정세와 외부 요인의 영향 가능성까지 다양한 시각이 제기되었다. 이처럼 사건은 단일한 원인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사건은 유신체제 말기의 모순이 응축된 결과였다. 노동 문제와 정치 탄압 그리고 민중 항쟁으로 이어진 흐름 속에서 권력 내부의 분열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이후 대한민국은 새로운 정치 질서를 모색하는 과정에 들어섰고 이 사건은 장기 집권과 민주주의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