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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월도의 일몰·젓갈·철새가 만드는 시간

by 아침조각 2025. 9. 19.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는 바다를 막아 육지가 된 뒤에도 섬의 기억을 품은 채, 간월암 일몰과 어리굴젓, 천수만 철새로 사계가 분명한 여행을 선사한다.

간월도는 섬→간척→육지형 섬으로 이어진 한국 근현대의 압축 파일이다. VLCC 물막이의 기술사, 간월암 일몰의 미학, 어리굴젓의 생활사, 천수만 철새의 생태사가 한 지평에서 겹친다. 여행자는 포구에서 젓갈 한 병을 들고, 모래톱을 건너 암자에서 노을을 보고, 제방 위에서 새의 군무를 올려다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바다는 뒤로 물러났어도 섬의 시간은 여전히 흐른다. 간월도는 오늘도 바람을 등지고 빛을 맞으며, 사람·음식·새가 빚는 장면을 차곡차곡 이어가고 있다.

 

 

간월도의 일몰·젓갈·철새가 만드는 시간

 

 

 

 

1) 섬의 기억과 거대한 간척

간월도는 본래 천수만 안에 떠 있던 작은 섬이었다. 행정상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면적 0.88㎢, 해안선 11km, 최고지점 70m, 2021년 기준 71가구 350명이 살아가는 곳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사각에 들던 섬은 1980년대 들어 국가 차원의 간척·방조제 사업으로 일상이 뒤바뀌었다. 1984년 시작된 대규모 공사로 천수만은 서산 AB지구 담수호와 광활한 농경지로 탈바꿈했고, 간월도는 더 이상 배를 타야만 닿을 수 있는 섬이 아니라 제방길로 드나드는 육지형 섬이 되었다.

지형을 펼쳐 놓고 보면 그림이 선명하다. 간월도에서 오른쪽 멀리 황도가 떠 있고, 그 뒤로 길게 누운 안면도의 실루엣이 바람 방향을 말해 준다. 왼쪽에는 홍성 해안이 가깝고, 정면으로는 천수만의 마지막 섬 죽도가 아련하다. 섬 북쪽으로는 이미 바다가 아니라 담수호와 농경지가 층층이 이어진다.

간척의 하이라이트는 누구도 잊지 못할 물막이 막바지였다. 최종 연결 구간이 260m 남았을 때 유속이 초속 8.2m까지 치솟아 토석이 밀려나갔고, 여기서 나온 아이디어가 이른바 VLCC 유조선 공법이다. 초대형 유조선을 방조제 사이에 좌초시키듯 가로막은 뒤 탱크에 바닷물을 채워 가라앉혀 조수 유입을 차단하고, 그 사이를 연결하는 방식. 흔히 정주영 공법으로 불리는 이 해법 덕분에 서산·태안 일대는 오지에서 서해안 시대의 전면으로 이동했다. 방조제가 닿은 뒤 창리에서 간월도로 오가던 나룻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섬은 육지형 생활권에 편입됐다.

물론 변화에는 명암이 있다. 광활한 갯벌과 저층 해양생태는 움츠렸고, 대신 담수호와 논·갈대 군락이 만들어낸 새 서식지가 탄생했다. 이로 인해 천수만은 연 260여 종, 40~50만 마리의 철새가 모여드는 세계적 도래지가 되었다. 간척이 빚은 경관과 생태의 전환이 바로 간월도의 오늘을 규정한다.

 

2) 간월암 일몰과 물양장, 그리고 어리굴젓 간월도의 현재형 풍경

간월도에 들어서면 먼저 어리굴젓 기념탑이 반긴다. 음식 이름으로 세운 이색 기념탑답게, 매년 정월대보름 무렵에는 굴 부르기제 라는 민속행사가 이어진다. 공원과 주차장을 지나면 해안길이 부드럽게 휘돌고, 물이 드나드는 모래톱 너머 작은 바위섬에 다다르면 이 섬의 상징 간월암(看月庵)이 모습을 드러낸다.

간월암은 이름 그대로 달을 본 암자다. 전해지기로는 무학대사가 이곳 토굴에서 달빛을 마주하며 깨달음을 얻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간조에는 모래길이 열려 걸어서 오가고, 만조에는 바위산 위의 작은 전각들이 물 위에 떠 있는 듯 보인다. 해질녘이면 바다는 금빛을 띠고, 간월암 뒤로 태양이 기울며 전각의 처마선과 바다 수평선 사이로 불타는 오렌지가 번진다. 이 장면 하나를 찍기 위해 사계절 사진가들이 몰려든다. 대웅전·지장전·요사채·산신각이 아담하게 모여 있고, 경내에는 250년생 사철나무가 푸른 잎을 지켜낸다.

섬 남쪽의 간월항 물양장은 또 다른 일상의 무대다. 넓은 계류장, 길게 뻗은 방파제, 그리고 실처럼 가늘게 이어지는 서산B지구 방조제가 한 화면에 들어온다. 바닷바람 맞으며 회 한 점 올리는 저녁이면, 상인들이 “노을 맛에 밥맛을 잃는다”고 농담할 만큼 석양 스폿으로도 유명하다. 물양장 한쪽에 잔뜩 쌓인 소라껍데기 그물은 쭈꾸미 어구다. 빈 껍데기를 집으로 삼는 습성을 이용해 유인하는 방식으로, 봄·가을이면 포구가 더욱 분주해진다.

그리고 간월도의 브랜드 문장, 어리굴젓. 이 지역 굴은 갯벌에서 오래 자라 맛의 골이 깊고, 물날개(미세한 털)가 많아 양념이 골고루 스며 발효가 안정적이다. 대개 11~4월 물때에 맞춰 갯벌로 나가 채취하고, 가공장에서는 바닷물로 세척해 천일염 약 10%로 버무린 뒤 약 20℃에서 2주 정도 숙성한다. 한 달 20일 안팎 바다에 서는 노동은 쉽지 않다. 서해의 칼바람, 허리를 굽힌 채 진흙을 딛는 체력, 밀물에 쫓기는 시간표까지. 그럼에도 어촌계가 전량 수매하는 안정된 구조 덕에 굴은 지금도 섬 살림의 한 축이다. 기념탑과 노점들, 병입된 젓갈의 반짝이는 표면은 수백 년 이어진 식문화의 오늘을 상징한다.

 

3) 철새들의 고향, 천수만 탐조법: 가창오리 군무에서 일몰까지

간월도의 풍경은 겨울에 절정에 오른다. 천수만 담수호와 주변 논·갈대밭은 가창오리·큰고니·큰기러기·노랑부리저어새·흑두루미 등 40~50마리의 겨울손님으로 가득 찬다. 특히 천수만을 상징하는 가창오리는 해질녘 군무로 전율을 선사한다. 해가 수평선에 닿을쯤 수km 길이의 거대한 무리가 한 몸처럼 뒤틀리고 응축되며 하늘에 검은 비단무늬를 수놓는다. 30~40분 남짓 펼쳐지는 이 군무는, 인간이 만든 어떤 공연보다도 압도적인 생명의 형식이다.

탐조 팁은 간단하다.

시간: 해넘이 1시간 전–해넘이 직후. 일몰과 군무가 겹친다.

포인트: 간월호 제방을 따라 설치된 전망대, 담수호와 논 경계부. 바람이 강하면 새들이 낮게 돈다.

장비: 쌍안경/망원경, 흔들림을 줄이는 견고한 삼각대, 방풍 아우터·보온 내피. 해풍이 매섭다.

매너: 새와의 거리 유지, 큰 소리·플래시 금지, 갯벌·논두렁 출입 금지 구역 준수.

철새가 몰려드는 배경에는 간척 이후 형성된 낙곡(수확 후 남은 곡식), 담수호의 수생식물·어류, 갈대 군락이 있다. 갯벌 생태가 줄어든 대신 논 습지 생태가 커지면서, 천수만은 ‘사라진 것을 애도하고, 새로 도착한 생명을 환대하는’ 역설의 공간이 되었다. 간월암에서 일몰을 본 뒤, 제방을 따라 철새의 귀환을 바라보는 루트는 간월도의 겨울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하는 코스다.

간월도 마을을 걷다 보면 부석초 간월분교, 구세군 간월도영문, 간월도1·2길 같은 생활 지명이 눈에 들어온다. 어항과 학교, 포구와 교회, 기념탑과 분교가 반지처럼 이어지며 섬의 기억을 간직한 육지라는 이곳의 정체성을 각인한다. 어항의 상차림, 기도하는 암자, 하늘을 가르는 군무가 한 시간 안에 펼쳐지는 곳 그게 간월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