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돌아보는 것으로도 아름다움에 취하는 가거도

by 아침조각 2025. 9. 20.

목포에서 바다를 200km 넘게 건너야 만나는 최서남단의 외딴섬, 가거도는 한번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절경에 취하게 만드는 섬이다.

가거도는 사람과 파도, 바위와 바람이 함께 쌓아 올린 거대한 서사시다. 국토의 바깥 경계를 지키며, 어장과 철새와 숲을 품고, 때로는 태풍과 겨루고 때로는 햇볕과 타협하며 ‘가히 살 만한 섬’의 조건을 매일 갱신한다. 멀고 험하다는 이유로 미뤄 둔 여행이 있다면, 가거도만큼은 마음의 지도에 한 번쯤 꼭 찍어 두자. 

 

돌아보는 것으로도 아름다움에 취하는 가거도

 

 

1) 한국 최서남단의 섬, 가거도라는 지명 안에 든 역사와 삶

 

전남 신안군 흑산면 끝자락에 자리한 가거도는 총면적 9.710㎢, 해안선 22km, 2021년 기준 343세대 504명이 살아가는 국경의 섬이다. 목포에서 직선 145km(뱃길 233km), 흑산도에서 남서쪽 82km 더 나가야 닿는, 말 그대로 바다 한가운데 점 하나로 떠 있는 고도(孤島). 이 먼 거리와 거친 물길 탓에 6·25 전쟁 때 소식을 멀리서만 들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을 정도로 바깥세상과의 거리는 멀었다. 지금도 쾌속선으로 쉬지 않고 달려 4시간 30분 안팎. 그러나 바로 그 거리감이 가거도의 고유한 시간을 지켜 주었다.

지명에는 섬사람들의 마음이 비친다. 일제강점기 행정명으로 쓰인 ‘소흑산도’ 대신, 섬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가히 살 만한 섬”이라는 뜻의 가거도(可居島)를 불러 왔다. 더 오래 거슬러 올라가면 ‘아름다운 섬’이라는 의미의 가가도(嘉佳島/可佳島) 표기도 보인다. 처음 입도한 이는 16세기 말 서씨, 본격적인 취락 형성은 1800년 무렵 나주 임씨가 건너오면서 시작되었다 전한다. 등대 옆 선사 유적지에서는 패총과 돌도끼·토기 파편 등 신석기 유물이 발견되어, 훨씬 이전부터 사람이 바다를 건너 이 섬에서 살았음을 보여 준다.

가거도는 지경(地境)과 지정(至情)이 맞닿은 곳이다. 동지나해 북단 황금어장을 코앞에 둔 어업 전진기지, 국제 해상분쟁의 전면을 지켜 낸 해양 안보의 최전선, 그리고 남쪽 끝 마라도·동쪽 끝 독도와 함께 국토의 끝을 외곽에서 감싸는 방패. 겨울 대륙의 북서풍과 여름 동지나해의 태풍이 번갈아 직격하는 까닭에 가거도의 바다는 언제나 긴장과 생동 사이를 오간다. 그 파고 위에서 섬은 멸치·돔·농어·전복·해삼, 육지에서는 후박나무와 방목 흑염소 같은 자원을 길러 왔다.

섬살이의 ‘거리’를 좁힌 것은 교통의 변화다. 예전에는 목포에서 흑산도에 하룻밤 묵고 새벽배로 6~7시간 더 흔들려 들어오는 게 상례였지만, 지금은 쾌속선과 주민 운임 지원제가 생활을 바꾸었다. 편도 6만 원이 넘던 뱃삯을 주민은 5,000원만 부담하는 제도 덕분에, 섬사람들은 “이웃집 들르듯” 뭍을 오간다. 가거도는 더는 고립의 섬이 아니라, 멀지만 닿을 수 있는 섬으로 바뀌었다.

 

 

2) 섬의 하루를 걷다: 항리의 포구, 독실산의 능선, 대풍리와 등대까지

가거항에 배가 닿는 순간부터 섬은 살아난다. 선착장 앞 옹벽은 성곽처럼 높고, 그 위에 가거도의 명승을 그라피티로 새겨 넣었다. 태풍 때면 통제되는 이 옹벽은 섬의 거칠음과 사람의 의지를 동시에 말해 준다. 방파제 끝 거대한 암반은 항만 공사 때 절개한 흔적으로, 지금은 김부연 하늘공원으로 정비되어 있다. 4·19 혁명 당시 순국한 가거도 출신 김부연 열사의 이름을 붙인 공원에서 내려다보는 포구는, 거친 절벽과 온순한 갯마을이 한 화면에 포개지는 장면을 만든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가파른 계단길이 시작된다. 한 사람 겨우 지나갈 폭의 길 양옆으로는 빈집과 돌담, 채마밭과 창에 기대 선 그물더미가 번갈아 선다. 길머리에 이르면 가거도초등학교·흑산중 가거도분교가 마을을 내려다본다. 유치원까지 한데 모여 있는 작은 교육 타운은 섬에 여전히 아이들의 목소리가 남아 있음을 증명한다. 동백나무 둘레의 책 읽는 소녀상, 운동장 골대 위로 보이는 수평선은 섬 학교만의 풍경이다.

가거도의 지붕은 독실산(639m). 한라산·성인봉 다음으로 높은 섬의 산답게, 능선은 웅장하고 사위는 시원하다. 출장소나 지서에 요청하면 정상까지 차량 지원을 받을 수 있어 접근이 어렵진 않다. 청명한 날이면 정상에서 제주도와 중국 땅의 윤곽이 아스라하게 잡힌다는 전설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정상 부근 하늘별장(경찰 레이더 기지)를 지나 능선을 타고 3구 대풍리로 내려서는 길은 가거도 트레일의 하이라이트다. 비바람이 깎아낸 구릉, 이끼 입은 바위, 쓰러진 고목이 만드는 초록의 터널… 길은 거칠고 때로는 전봇대와 흰 페인트 표지가 유일한 안내자다.

대풍리는 이름처럼 바람의 마을이다. 북동면으로 활짝 열린 지형 때문에 겨울 북서풍이 정면으로 휘몰아친다. 지붕이 날아간 폐교와 잡초 무성한 운동장, 미역철이면 도르래로 해조를 끌어 올리는 해안의 도르래 시설이 섬살이의 거친 손길을 말해 준다. 그럼에도 이곳이 ‘가히 살 만한’ 이유는 분명하다. 돌미역·돌김이 자라는 너럭바위, 감성돔·줄돔·농어가 붙는 갯바위, 바다와 맞닿은 지형이 주는 압도적 풍광. 길이 나고 사람 발길이 잦아지면, 외딴 오지마을의 삶도 조금 더 편안해질 것이다.

대풍리에서 해안을 타고 북쪽으로 가면 하얀 가거도 등대가 바다에 붙듯 앉아 있다. 1907년 처음 불을 밝힌 이 등대는 해발 84m 중턱에 있어 1구와 멀고 가파른 길 덕에 여행자들이 쉽게 닿지 못하는 곳. 대신 도착의 보상은 크다. 정겨운 정원과 소담한 건물, 그리고 등대지기의 따뜻한 커피 한 잔. “멀고 험한 길 끝에서 만나는 불빛”이란 말이 왜 등대에 붙는지, 이곳에서 비로소 이해된다. 등대에서 2구 항리로 내리는 길은 태풍에 훼손된 구간이 있어 흰 표식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항리는 가거도 서북쪽의 마을. 초원으로 덮인 작은 반도 섬등반도가 섬의 절반 이상을 조망하는 천혜의 전망대를 이룬다.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곳에서 바라보는 해넘이는 국내 최고 수준. 수평선에 걸린 오메가형 태양, 그 뒤에도 한동안 지지 않는 불붉은 노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늦게 지는 해라는 수식에 손색이 없다. 천연동굴은 옛날 피항 동굴로 쓰였고, 그 덕에 항리는 오랜 세월 어선 정박지로 번성할 수 있었다.

 

3) 파도·새·돌이 만드는 빼어난 체험: 방파제의 서사, 철새와 낚시, 해상 유람

가거도의 또 하나의 거대한 풍경은 방파제다. 길이 530m, 높이 12m, 폭 15.2m의 콘크리트 성채. 1979년 공사를 시작해 태풍이 올 때마다 무너지고 다시 쌓기를 반복, 28년 만인 2008년에야 겨우 완공했다. 공사비는 1,325억 원, 폭 8m, 무게 64t의 테트라포드가 2,000개나 파도에 유실된 흔적은 지금도 항만 곳곳에서 확인된다. 2012년 태풍 볼라벤의 상처를 딛고, 가거도는 아파트 9층 높이라는 슈퍼 방파제까지 계획하며 바다와 맞장을 뜨는 법을 배웠다. 방파제 위를 걷다 보면 ‘사람의 공학’과 ‘바다의 힘’이 겨루며 만든 풍경 앞에서 절로 숙연해진다.

가거도는 새들의 섬이기도 하다. 등대 앞바다 국흘도(구굴도)는 천연기념물 번식지로, 여름이면 슴새·뿔쇠오리, 어느 해엔 수만·수십만 마리의 바다제비까지 몰려드는 장관을 만든다. 황로·쇠백로가 먹이활동을 하고, 국제 보호종 섬개개비가 번식하며, 흑비둘기·흰날개해오라기 같은 귀한 새들도 기록된다. 태풍을 앞둔 하늘에 때로 검은 구름처럼 몰려드는 항로 이동 군무는, 사람의 언어로는 끝내 다 옮기기 어려운 장면이다.

낚시꾼에게 가거도는 말 그대로 천국이다. 섬 전체가 포인트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특히 가거도에서 서남쪽으로 약 47km 떨어진 가거초는 ‘꿈의 낚시터’로 통한다. 해수면 아래 7~8m까지 솟은 거대한 수중 암초군이 만드는 조류대에서 북돔·감성돔·줄돔·농어·광어가 줄지어 달린다. 섬 주변 36km의 해안선—항리·대풍리·국흘섬 석광장 일대—도 포인트의 연속. 바람과 너울을 읽는 것만이 이곳의 유일한 규칙이다.

해안 절경을 제대로 보려면 바다에서 섬을 보라. 가거항에서 배를 타고 회룡산과 장군바위 사이를 빠져나가면, 녹섬·돛단바위·섬등반도·납덕여·망부석과 모녀바위·검은여·칼바위·빈주암·남문이 줄줄이 등장한다. 바람을 품은 바위, 파도를 끌어안은 절벽, 햇살에 반짝이는 해초밭이 시야를 흔든다. 육로에서는 만날 수 없는 해식·주상·풍화의 조합이 가거도의 해안을 한 폭의 지도처럼 펼친다.

내륙의 숲길 또한 풍성하다. 가거도는 후박나무 군락으로 유명하다. 수피를 한방에서 약재로 쓰는 이 나무는 주민들의 중요한 소득원이었고, 숲에는 굴거리나무·천리향 같은 희귀 수종이 빽빽하다. 계절이 바뀌면 방울새란·금세우란 같은 난초가 얼굴을 내밀고, 곰취·더덕·도라지 같은 산나물과 약초도 만난다. 바다는 날마다 표정을 바꾸고, 산은 계절마다 색을 갈아입는다.

여행 팁을 덧붙이면 이렇다.

입도/교통: 기상에 민감하다. 출항·기항지 변경 공지를 자주 확인하자. 섬 내 구간은 경사와 계단이 많아 트레킹화가 필수.

안전: 방파제·절벽 풍경은 아름답지만 강풍·너울이 잦다. 무리한 접근 금지, 구명조끼 착용.

에티켓: 국경의 섬은 생활공간이다. 사유지·어장·등대 업무 동선 배려, 쓰레기 되가져가기 철저.

베스트 시기: 봄·가을은 시계가 좋고, 가을 멸치 철과 겨울~초봄의 철새 시즌, 초여름의 바다 안개도 매력적이다.

가거도는 떠나는 순간까지 이야기를 남긴다. 멸치잡이 배의 어로요(漁勞謠), 항리의 늦은 해넘이, 등대의 고독한 불빛, 방파제의 콘크리트 잔주름. 이 모든 것들이 섬을 나서는 배의 키를 붙잡고 한동안 놓아 주지 않는다.